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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03~07 고구려 유적지와 백두산 천지

메나리 2007. 9. 15. 18:20

여행일정표

 

9/3 월  대한항공 KE869 13:10 인천국제공항 출발
                       13:30 대련공항 도착
          전용버스             노호탄광장, 러시아거리 관광후
                             단동향발(소요시간 4시간)

           석식 후 호텔투숙(단동가일양광호텔)
          중식 = 기내식, 석식 = 현지식

 

9/4 화 호산산성, 단교 관광후 집안으로 이동 

          광개토왕비/능, 장군총 국내성터, 환도산성
          중조철교 관광후 백산으로(억가하호텔)

          조식=호텔식, 중식=현지식, 석식=현지식

 

9/5 수  백두산 산문으로(1:30)
          백두산 천지, 고산화원, 금강대협곡, 제자하

          백산으로(억가하호텔), 발마사지체험

          조식=호텔식, 중식=현지식, 석식=현지식

 

9/6 목 환인으로 2:30분 정도
          오녀산성....졸본성
          단동으로(3시간), 압록강 유람선 관광후 (단동가일양광호텔)
          조식=호텔식, 중식=현지식, 석식=현지식

 

9/7 금 대련으로(4시간)
          성해광장 관광후 중식
          14:40 대련국제공항 출발
          16:50 인천국제공항 도착
          조식=호텔식, 중식=현지식

 

 

인천국제공항에서~


 

 

대련에서 내려 기다리는중에 화장실 표현이 재미 있어서~  그런데 많이 흔들렸군요

 

대련 공항~



 

4박5일동안 함께 한 버스~

 

 

대련시내에서......대부분 차안에서 찍은 사진~




 


 

 

노호탄광장~









 

 

대련시내~


 










 

앞으로 지겹도록 바라보아야 할 옥수수밭입니다~

 

대련에서 단동으로 가는중 차안에서 찍은 석양입니다~




대련 --->단동간 딱 하나있는 휴게소입니다~


 

 

휴게소 좌판에 있는 과일가게입니다......과일 형태가 우리것과는 틀리더군요~

 

단동에 석식 먹은 식당입니다.......중국에서 처음먹은 식사인데 먹을만 했습니다~



 

 

저녁 늦게 도착한 호텔(4성급)입니다~



 

아침에 일어나 창밖을 보며~

 

 

호텔 침대입니다......아침에 짐 있는채로 찰칵~~~

 

 




 

 

중국시간 7시 10분정도 가이드 말에 의하면 8시까지 출근이라서 바쁘답니다~







 

 

압록강 철교가 보이네요~

 

압록강변~


 

 




 

 

동북 3성......전형적인 주택 모습인것 같네요.

일정에 중국농촌주택 구경도 포함시킨다면 좋을것 같습니다.



 

 

 

[펌]

호산산성~

 

호산장성(고구려의 박작성)                                                                     
 


단동시에서 차량으로 20~30여분 거리에 있는 고구려의 박작성을 중국이 동북공정을 진행하면서 만리장성의 동단은 산해관인데, 이 곳 호산장성이 만리장성의 동쪽 맨 끝이라고 선전을 하고 있습니다.
  
▲ 만리장성과 비슷하게 복원해 놓았습니다.


 
이 곳에는 압록강에 섬으로 이루어진 북한 땅이 바로 한 발만 건너 뛰어도 될 정도로 가깝다고 해서 일보과(一步跨)라고 합니다. 한국 사람들이 오면 제일 가까운 곳에서 북한 땅을 볼 수 있다고 많이 찾고 있습니다.
 


산성을 내려와서 우측 성문을 통해서 몇 분이면 일보과를 갈 수 있으며,일보과를 가는 길목에는 게와 과일, 술, 게을 구워서 파는 중국 노점상들이 많이 있습니다. 강물 앞에 도착하면 중조국경 일보과라는 돌 표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이 곳에서는 북한 땅을 조금 더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고 압록강 지류를 따라서 한 바뀌 도는 유람선(나룻배)도 있습니다. 일행은 먼저 산성으로 올려 보내고 혼자서 박작성의 흔적을 찾아 보려고 물길을 따라서 산성 밑으로 돌아 보았으나 박작성의 흔적을 찾지는 못했습니다.

가이드가 뒤로는 가지말라하여 가보지 못헸습니다.  
 
일보과에서 물길을 따라서 산성 밑으로 20여분을 오르내리다 보면 호산장성 박물관이 나타납니다. 어떤 사람이 쓴 기록을 보면 저 박물관 옥상에서 내려다 보면 박작성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인다고 합니다.
 


 
 ▲ 뒷편에 있는 호산장성 박물관  ▲ 호산장성 뒷편으로 오르는 계단(상당히 가파름)
10여년 전 중국 학자들이 애하첨고성 동쪽에 있는 호산(虎山)에서 명나라 장성을 찾다가 고구려 산성을 하나 찾아냈는데 이 성이 바로 고구려 박작성으로 알려졌다. 보장왕 7년(648) 당나라가 쳐들어 왔을 때 '박작성은 산을 이용하여 요새를 세웠고, 압록강으로 튼튼하게 막혀 있었기 때문에 함락시키지 못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지금까지 압록강 입구에서 발견된 고구려 성은 애하첨고성과 이 호산산성 뿐인데 애하첨고성은 평지에 쌓은 성이기 때문에 유일한 산성인 호산산성이 박작성이 되는 것이다.

1998년 7월 말, 호산에 도착해 보니 고구려산성은 보이지 않고 최근 중국이 복원한 어마어마한 명나라 장성이 앞을 가로막는다. 몇 년 전 일본 방송국에서 제작한 [만리장성]이란 프로에서 만리장성의 동쪽 끝을 잠깐 보여준 것은 만리장성이 아니라 고구려산성이었다. 그리고 불과 몇 년 사이에 갑자기 명나라 장성이 등장한 것이다. 어려운 경제사정 아래서도 중국이 압록강 가에 대규모 장성을 새로 복원한 것은 이민족인 청나라의 지배를 벗어나 오히려 그 땅을 지배하고 있는 현실을 정당화하기 위한 강력한 의사표현과 같은 것이다.

기록에는 이 장성 끝 어디에 고구려 산성이 남아 있다는데 아무리 찾아보아도 보이지 않고 새로 쌓은 명나라 장성만 괴물처럼 버티고 있다. 끈질기게 수소문한 끝에 고구려 산성은 현재 명나라 장성을 복원해 놓은 산 뒤쪽, 다시말해 압록강 쪽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트럭을 타고 애강 가 둑을 달려 조그만 마을에 닿아 옥수수 밭을 한참 동안 헤치고 가자 드디어 호산산성이 나타났다. 고구려 이후 1300년이 지나도록 땅속에 묻혀 있던 산성유적이 발굴된 것은 1991년 9월부터 12월까지 3개월간이었다.

그러니까 필자도 1998년에야 처음 대하게 된 고구려 유적이고, 이 글이 호산 고구려 유적에 대한 국내 첫 발표이다. 대형 우물과 다양한 유물 우선 이곳 유적에서 가장 으뜸가는 것을 치라면 역시 우물이다. 고구려 산성에는 어디나 반드시 우물이 있는 것이 특징이지만 이처럼 완벽하게 남아있는 대형 우물은 처음 본다. 우물은 둥근꼴인데 안벽의 지름이 4.4m나 된다. 우물 벽은 모두 잘 다듬은 쐐기꼴 돌을 곧게 올려 쌓았는데 아직까지도 53층이나 남아 있고 깊이가 11.25m나 된다. 지금도 물이 가득 차 있는 것을 보면 사철 마르지 않는 우물이 되도록 깊이 팠던 것이다.

고구려 산성에서 보았던 메주같이 다듬은 돌로 절묘하게 쌓은 우물은 '고구려 우물'의 대표적인 모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물 바로 앞에 만든 부채꼴 건축물도 특이한 것이다. 이 유적은 비교적 큰 돌로 쌓았는데 평면은 대개 부채꼴이고 반지름이 14m 쯤 되고, 둘레는 담을 쌓았는데 뒤끝이 비교적 뾰족한 쐐기꼴 돌로 정연하고 단단하게 쌓았다. 계단은 없지만 평면이 마치 로마의 원형극장처럼 생긴 이 건축물은 무엇에 쓰였을까? '물을 담아 놓은 저수지일까?'

그렇다면 바닥이 바위여야 할텐데 돌을 깔아놓았으니 물이 다 새버릴 것이 아닌가?'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오르지만 아직 결론을 내리기는 빠르다. 우물 윗쪽에 있는 돌벽도 그 쓰임새가 분명하지 않다. 성벽 같기도 하고, 성벽에서 튀어나온 치성 같기도 하다. 그러나 그 밖으로 물이 흐르도록 물길을 만들어 놓은 흔적이 계속 이어져 있어 발굴을 더 해 봐야지만 그 분명한 쓰임새를 알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우물 속에서 잘 보존된 통나무배(獨木舟), 삿대, 나무구유, 나무통, 나무주발, 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통, 널빤지, 호리병 쪽박, 갈대자리, 동아줄, 질그릇 항아리, 쇠저울추, 고기뼈, 새뼈, 식물의 씨앗 같은 30여 가지 유물들이 쏟아져 나와 연구 결과에 따라서는 고구려 문화를 밝히는 획기적인 유적이 될 수도 있다 여기서 나온 통나무배는 길이가 3.7m나 되는 것이고, 여러 가지 나무로 된 기구들도 대단히 특이한 유물들이라 앞으로 고구려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될 것이다. 유물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중국이 아직 발표를 하지 않고 있어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출처]서길수 교수의 고구려 역사유적답사에서 
박작성은 고구려 지방성의 하나로서 압록강 하구에 위치한 호산산성이 박작성으로 비정된다. 박작성의 축조 연대는 알 수 없으나, 고구려가 압록강 하구의 서안평현(西安平縣)을 차지한 것은 3세기경이다. 그런데 서안평현성은 현재의 애하첨고성이고, 박작성인 호산산성의 축조는 후대일 것이다. 압록강 하구에 위치하여 압록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길목을 통제하는 요충성이다.

이 성은 애하와 압록강이 합류하는 지점의 돌출된 독립구릉 위에 자리잡고 있다. 호산의 북쪽은 명대의 천리 장성이 시작하고 있는데, 호산 정상을 통과하는 장성의 장대 받침은 고구려산성의 성벽을 이용하였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고구려 호산산성은 호산의 남쪽의 사면에 자리잡고 있는데, 아직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전모를 알 수 없다. 성 안에는 둘레 4.4m의 우물이 남아 있다. 우물의 석축벽은 모두 잘 다듬은 쐐기꼴 돌을 곧게 올려 쌓았는데 아직까지도 53층이나 남아 있고 깊이가 11.25m나 된다.

648년에 당 태종이 설만철(薛萬徹)과 배행방(裴行方)으로 하여금 군사 3만여 명과 누선 전함을 이끌고 내주(萊州)로부터 바다를 건너와서 공격하였다. 이들은 압록강으로 들어와 박작성 남쪽 40리 되는 곳에 이르러 군영을 쳤다. 박작성주 소부손(所夫孫)은 보병과 기병 1만여 명을 거느리고 막았으나, 배행방의 공격으로 패퇴하였다. 당군이 박작성을 포위하였으나, 지형의 험준함에 의지하고 있으므로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고구려의 장수 고문(高文)은 오골성과 안시성 등 여러 성의 군사 3만여 명을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였는데, 설만철이 군사를 나누어 이에 대응하니, 고구려 군사가 패하여 무너졌다. 현재 호산산성의 북쪽에 중국 명대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라는 성벽 일부가 복원되어 있다.                                  - 다음 백과사전 발췌 -
 


 

 






 


 




 

 

조그만 물길건너 오른쪽으로 보이는게 북한땅입니다~










 













 

 

일보과......한발이면 북한땅이랍니다.

한 10여 미터 될까요? 배 건너편 철조망 있는데가 북한땅~








 

 

산성과 택시~

 

 

화장실 가기위해서 세웠을때......중국 초등학교~


 

옆면이 탁트인 화장실......여자분들은 안에서 남자들은 옥수수 밭에서~


 

한자표현이 보고싶어서~

 

 

집안으로 가는중~~~





 

 

중국사람들은 땅만 보이면 옥수수를 심나봅니다.

강가에도 많이 보이네요~~~


 


 

 

집안에서 중식......철망에 소고기 구워먹기------참이슬 소주가 보이길래 한병 달랬더니 40위안...









 

[펌]

민족의 우수성으로 쌓아올린 환도산성·산성하 무덤군


우리일행이 광개토대왕비를 돌아보고 발길을 돌린 곳이 환도산성(丸都山城)이다.
광개토대왕비에서 버스로 약 40여분을 가니 환도 산성이 나타났다. 첫눈에 보아도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방어를 위한 요새지로 삼기에 적지인 곳이다. 이 환도산성은 필자가 보건데 전시 또는 유사시에 긴급히 이동, 이 성에 은신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하면 국내성으로부터 약 2~3km 떨어진 이곳 환도산성은 고구려가 외침을 받을 때 전시 방어를 위해 마련된 곳으로 자연을 이용한 방어지구인 것이다. 환도산성 북쪽은 3면이 높은 험준 산령으로 둘러싸여 있고 들어가는 남쪽 한 면만 트여져 있어 그야말로 천혜의 요새다. 해발 676m의 환도산성은 동쪽은 산성지산, 서쪽은 칠성산에 둘러싸여 비상시 수도방위를 위한 완벽한 지형이며 그래서 국가도 보전되고 왕족 또한 변란으로부터 보호되었을 것이다. (고구려는 제2대 유리왕 때에 졸본성에서 두 번째 수도인 국내성으로 도읍을 옮기는데 국내성은 평지에 궁터를 잡았다.
그래서 큰 전쟁이 일어나면 군·민·관이 모두 국내성에서 이 환도산성으로 근거지를 옮긴다. 그리고는 침입한 적들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게 되는데 큰 전쟁이 두 번에 걸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천혜의 요새 환도산성, 고구려 기술 엿보여

첫 번째 전투는 고구려 제11대 동천왕 20년(AD246년)에 위나라와의 전쟁이었다. 위나라의 관구검이 1만 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쳐들어와 처절한 전투를 벌였다. 그 결과 그렇게도 견고한 환도산성이 급기야 일시에 침략당하는 수모를 겪었다고 한다.
두 번째는 고구려 제16대 고국원왕 12년(AD342년)에 연나라 모용함의 침입으로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구전에 의하면 동천왕은 관구검과의 초기 전투에서 아주 대승을 거두었다. 그래서 자만에 빠진 나머지 경계를 게을리 해 군율이 흐트러져 방위태세에 허점을 보였다.
이러한 틈을 타서 관구검은 그 요새지 가운데 가장 험난한 곳을 골라 야간 공격을 하였다. 다시 말하면 병력배치를 입구 쪽인 남쪽에만 치중하고 지형이 험난한 곳은 감히 쳐들어오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이 전투에서도 일시 침략당한 기록이 있다.
동천왕이 조금만 치밀했었어도 아마 이런 수모는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것을 기록하는 것은 이것이 우리의 역사이기에 모두 경각심을 갖자는 의미에서다.
환도산성의 앞 남쪽에는 인공적인 성벽이 가로놓여 있는데, 이 성곽은 오랜 세월을 지내오면서 중간부분이 끊어진 채 방치되어 있다. 그래도 그 모습을 확연히 볼 수 있어 견고하게 쌓아올린 우리네 조상들의 지혜와 토목기술에 다시 한번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환도산성의 동서남북 총 길이는 무려 7~8km에 이르니 이 또한 국가를 보위하기 위한 슬기이리라.

우리의 역사 보존하지 못해 안타까워

남문을 통하여 환도산성으로 올라가 보았다.
남문은 동서남북 중 인공으로 성을 축성하였기에 더욱 그 품위가 돋보였다. 그 성곽은 고대에서 고구려까지의 토목기술 등 축성술을 볼 수 있는 큰 자료가 되고 있다. 주로 화강암으로 서로 엇갈리게 쌓아올린 성곽은 오랜 세월을 견디어 오느라고 중간 중간 패인 곳이 눈에 자주 띄었으나 대체적으로 그 형태가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었다. 수천 년이 지난 지금가지 그 위용이 있으니 더 말하여 무엇 하겠는가!
남문 터를 지나 성위에 오르면 널따란 터가 보인다. 이곳이 왕궁터일 것이라는 것을 바로 느낄 수 있었다. 길이 100여m 너비 6~70m 이르는 대형 왕궁터에는 이 곳을 개발할 당시 많은 역사유물이 발견되었고 특히 기와조각 주춧돌 등의 역사유물이 다량 출토되었다. 왕궁 터 주위에는 농경지가 있어 유사시에는 그곳에서 자급자족 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 것도 이곳의 특징이다.
왕궁터 서쪽에는 돌 축대가 있었다. 이는 아마도 전시에 장군이 지휘하던 곳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이곳에서는 성 안팎이 모두 보였다. 중국은 최근 이곳에 인부를 써서 보수공사를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문화재의 보수 또는 복원은 반드시 전문가에 의해 그것도 고증을 거쳐 진행하여야 하는데 과연 어느 정도 고증을 거쳤는지 의심스럽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로다! 분명 우리의 땅인데 우리의 영유권 밖에 있으니 말이다.
“조상들을 뵙기가 부끄러워 얼굴을 못들겠다”라고 옆에 있던 어느 분이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산성하 무덤군, 호국영령의 무덤으로 추정

환도산성(丸都山城)을 올라가는 첫 입새 오른쪽으로 광활한 평지가 있다. 구체적으로는 환도산성이 있는 북쪽 그 옆으로 흐르는 퉁구강과 환도산성 사이에 평지가 있다. 이 평지에는 수천기의 무덤이 있는데 그 크고 작은 무덤이 온통 평지를 뒤덮고 있다. 이곳이 세계최대의 고분군(古墳群)이다. 현재 남아있는 숫자만도 1582기가 된다고 한다. (학자에 따라서는 1만2000여 기가 있다고도 한다.)
대부분 적석 묘와 봉토 묘로 그 크기는 그 무덤의 당시위상에 걸맞게 쌓아져 있으며 몇몇 발굴된 무덤 안에 벽화도 그려져 있고 거북 껍데기 등으로도 쌓여 있다. 우리가 이곳에 갔을 때는 눈이 쌓여있어 그 눈에 햇살이 반사되어 눈이 부셨다.
그러나 눈이 쌓여 있기 때문에 더욱 그 고분들의 명암이 뚜렷하였다. 이곳은 바로 환도산성의 아래쪽에 위치하여 있어 ‘산성하 무덤군’으로 불리는데 “당시 치열한 전투로 목숨을 바친 이를 위하여 마련된 것으로 추정 된다”고 안내인이 설명했다. 무덤군의 앞쪽으로는 조그마한 내(川)가 있는데 겨울철이라 얼어 있었다.
이 무덤들의 주인공들은 이제 싸늘한 시체로 누워 우리나라가 아닌 남의 나라에 묻혀 있는 것이 더 안타까울 것이다. 안내인은 “그 당시 국가와 민족을 위하다가 전사한 자들이 묻혀있는 무덤인지 모른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 같은 추정이 사실이라면 지금의 국립묘지에 해당되는 곳이 아니겠는가! 참으로 우리민족의 우수성을 다시 한번 입증하는 것이리라. 우리는 이미 수천 년 전에 국가를 위하다 목숨 바친 이를 정성껏 모신 국가이니 말이다.

 

우리는 산성하 무덤군을 못 보았습니다...
 

 




 




 

그시대 그사람들은 간데없고 과일파는 중국 아줌마와 야생화만 한가로이 있습니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보니......꿈이런가 하노라 라는 시조만 생각납니다.









 

 

















 

장수왕릉 [長壽王陵] 
 
 
요약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현[集安縣]에 있는 고구려시대의 석릉(石陵).
 
소장/소재지  중국 지린성 지안현
시대  고구려시대
종류  석릉
 
 
3세기 초부터 427년까지 고구려가 도읍한 지안현 퉁거우평야[通溝平野]에는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와 고구려 최대형 무덤인 태왕릉(太王陵)·사신총(四神塚) 등 석릉과 토분(土墳) 1만 기(基)가 있으나 외형이 거의 완존(完存)한 석릉은 이것뿐이다.

화강암 표면을 정성들여 가공한 절석(切石)을 7단의 스텝 피라미드형으로 쌓았는데, 기단(基壇)의 한 변 길이 33m, 높이 약 13m 이다. 기단의 둘레에는 너비 4m로 돌을 깔았으며, 그 바깥둘레에 너비 30m 의 역석(礫石)을 깔아 능역(陵域)을 표시하였다. 널방[墓室]은 화강암의 절석을 쌓아 지었는데, 천장석(天障石)이 있는 굴식[橫穴式]이며, 2개의 널받침[棺臺]이 있다.

1905년 일본인 학자 도리이[鳥居龍藏]가 처음으로 현지조사하고, 프랑스 학자 E.샤반과 일본인 세키노 다다시[關野貞] 등이 조사하여 《남만주조사보고(南滿洲調査報告)》 등에 발표한 뒤부터 학계에 알려졌다.

돌무지돌방무덤[積石石室墓]은 대체로 3세기 말∼4세기 초로부터 5세기에 나타나며, 기와를 통해서는 4세기 중엽 이후 5세기 전반으로 추정되므로 이 장군총의 연대는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전반일 것으로 보고 있다.
이 무덤의 주인공으로는 광개토대왕과 그 아들인 장수왕(長壽王)의 것이라는 두 설이 있는데, 중국측에서는 태왕릉을 광개토대왕릉으로, 장군총을 장수왕릉으로 보고 있으나 고분의 유품이 모두 도굴당하였기 때문에 추측에 의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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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총( 將軍塚 )

◈ 소재 : 중국 길림성 집안 (中國 吉林省 集安)

만주 지방에서 일어난 고구려가 선대의 돌무덤 양식을 그대로 받아들여 발전시킨 것이 돌 무지 무덤인데, 돌각담 무덤이라고도 하고 적석총이라고도 하는 바 고구려 전기 수도였던 만주 집안 지방에는 무려 1만 기 이상의 고구려 고분이 있다.

기원전 3,4세기 고구려 중기에 오면 돌무지무덤에 3단, 5단, 7단식으로 층 수가 증가하면 서 마치 계단식 피라밋형의 돌무덤으로 축조되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이른바 장군총과 태 왕릉이다.

이 무덤은 한때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의 무덤 (廣開土王陵)으로 여겨졌었다. 그러나 광개토 대왕의 비석에서 불과 500m 거리에 위치하고 있는 적석총에서 '태왕릉이 산처럼 굳건하고 평안하기를 바란다 ( 願太王陵 安如山 固如岳 )'라는 의미의 명문(銘文) 벽돌이 출토되고, 무덤의 크기도 이 장군총에 비하여 4배나 되어 이것을 오히려 광개토대왕의 무덤 (太王陵) 으로 여기기도 한다.

반면 이 장군총은 광개토대왕의 비석으로부터 1Km나 떨어져 있어, 고 구려 장수왕의 무덤이라 추정하는 학자도 있지만 아직 분명한 것은 아니다. 이 장군총은 대략 5세기 이전에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면은 국내성 (集安)을 바라보 는 서남향이며 네 귀가 동서남북을 가르킨다. 최근에 밝혀진 바로는 석실 안 석관의 머리 방향이 53도로 북동쪽에 있는 백두산 천지 (白頭山 天池)를 향하고 있다한다. 즉 고구려의 근본이 백두산 천지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추정으로서 어느 정도 인정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장군총은 잘 다듬은 화강석재로 7단의 방단 (方壇)을 계단형으로 쌓았고 분구의 정상은 절두방추형을 이루었으며 제1방단은 4단이지만 제2방단에서부터 윗부분은 3단으로 되어있다. 높이는 12.4m, 제1방단의 한 변은 약 31.58m, 제일 위의 제7방단의 한 변은 약 15m이고 각 변은 각각 방위선상 (方位線上)에 놓여있으며 제1방단의 각 변에는 각기 3개의 긴 자연석 (가장 큰 것의 너비는 약 2.7m, 길이는 4.5m )이 기대어 세워져 있다.

그 내부 주체인 횡혈식 석실은 제3방단의 윗면이 현실 바닥이고 제5방단의 서남면에 연도 가 달려있으며 평면은 정방형, 한 변의 길이는 약 5.5m, 높이 또한 약 5.5m이다. 현실의 네 벽은 다듬은 화강암을 사용하여 6단으로 쌓아올리고 네 벽의 윗부분에는 벽면과 평행으로 1 단의 방주형 (方柱形) 평행 굄돌을 놓고 그 위에 커다란 판석 한 장을 덮어 구축한 평천장이다. 그리고 벽면, 천장에는 석회를 바르고 현실 입구에는 2장의 돌문이 있었으나 파괴되었 다.

연도의 길이는 약 5.45미터, 너비 2.6미터, 높이 약 2.6미터이다. 과거 일제시대에 장군총의 맨 위층인 제7층의 사방 변두리에서는 난간 구멍이 발견되었고 피라밋의 위와 주변에서 많은 양의 기와와 벽돌이 발견된 바 있다.

또 맨 위 정상부 동남쪽 에서 여러 장의 판석이 발견되었는데, 아마 주춧돌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이로보아 피라밋 위에 원래는 어떤 건축물을 일종의 능묘 위에 세우는 사당 (陵上廟)과 같은 성격의 이른바 향당 (享堂)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그리고 장군총을 둘러싼 12개의 자연석(護石)과 주변에 배총(陪塚)이라 하여 이집트 피라 미드의 스핑크스처럼 이 장군총을 지켜주는 수호자가 있다. 호석은 십이지신상의 기원으로 여기기도 하지만 배총에 대하여는 아직까지 분명한 학설이 제기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장군총 실측

장군총 내부

1910년대 한국인이 찍은 '장군총'

 

 

 


 

 

장군총에서 바라본 북한의 산하와 동광산~










 


 

 

광개토대왕비로 가는길......나무가 이쁘네요.. 가로수로도 쓰이더군요~

 

 

안에서는 사진을 못찍게 합니다~

 

 

광개토대왕릉비 [廣開土大王陵碑]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현[集安縣] 퉁거우[通溝]에 있는 고구려 제19대 광개토대왕의 능비(陵碑).
 
 
광개토대왕릉비  중국 지린성 지안(집안 集安). 중국에서는 '호태왕비'라고 부른다.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라는 광개토왕의 시호(諡號)를 줄여서 '호태왕비'라고도 한다. 그리고 현재 비가 서 있는 곳으로부터 서남쪽 약 300m 지점에 있는 태왕릉(太王陵)을 광개토왕의 능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유력하다. 왜냐하면 부근에서 ‘태왕릉이 산악과 같이 안정되고 굳건하기를 원한다(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라는 명문이 새겨진 벽돌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이 비는 광개토왕의 아들 장수왕(長壽王)이 왕 3년(414년)에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으로, 당시 수도였던 압록강 유역인 중국 길림성 통화전구 집안현 통구성(吉林省 通化專區 輯/集安縣 通溝城 - 중국 현지에서는 集安縣)에서 동북쪽 약 4.5km 지점의 태왕촌(太王村)에 있다.
비는 각력응회암(角礫凝灰岩)의 사면석이나 자연스러운 모습의 긴 바위 모습이다. 비는 대석과 비신으로 되어 있고, 비신이 대석 위에 세워져 있으나, 대석과 비신 일부가 땅속에 묻혀 있다. 높이는 6.39m로 한국 최대의 크기로 고구려 문화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너비는 1.38~2.00m이고, 측면은 1.35m~1.46m로 불규칙하다. 비의 머리 부분은 경사져 있다. 대석은 3.35×2.7m 이다. 네 면에 걸쳐 1,775자가 새겨져 있는 것으로 통상 알려져 있다.(판독 여부가 불분명한 부분이 있고 비석이 불규칙하여 글자 수 통계에 이론이 있다.) 본래 비석만 있었으나, 1928년에 집안현 지사 유천성(劉天成)이 2층형의 소형 보호비각을 세웠고, 다시 1982년 중공 당국이 단층형의 대형 비각을 세워 비를 보호하고 있다.

비문의 내용
비문의 내용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부분(제1면 1행 ~ 6행)은 고구려의 건국신화와 추모왕(鄒牟王=동명왕),유류왕(儒留王=유리왕),대주류왕(大朱留王=대무신왕) 등의 세계(世系)와 광개토왕의 행장(行狀)을 기록해 놓았다. 둘째 부분(제1면 7행 ~ 3면 8행)에는 광개토왕 때 이루어진 정복활동과 영토관리(만주 정복, 백제 정벌, 신라 구원, 동부여 및 숙신 정벌)에 대한 내용들을 연대순으로 기록해 놓았다. 비문의 기록에 따르면, 광개토왕은 64개의 성(城)과 1,400개의 촌(村)을 공파(攻破)하였다. 왕의 외정에는 정토복속(征討服屬)과 토경순수(土境巡狩)가 있으며, 한반도 내는 전자의 대상이 되어 동일세력권으로 만들려는 의지가 표출되고 있다. 그러나 영락 10년(400)조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왜는 축출의 대상이었고 정토의 대상은 아니었던 것으로, 일본이 주장하는 임나일본부와 같은 실체를 찾아볼 수 없다. 셋째 부분(제3면 8행 ~ 4면 9행)은 능을 관리하는 수묘인(守墓人) 연호(煙戶)의 숫자와 차출방식, 수묘인의 매매금지에 대한 규정이다. 이 부분은 고구려 수묘제(守墓制)의 실상과 함께 수묘인의 신분 등 사회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연구와 논쟁
압록강 북쪽에 큰 비가 있다는 사실은 <용비어천가>를 비롯한 조선 전기의 몇몇 문헌에 언급되어 있지만, 조선후기까지 비문을 직접 확인한 적은 없었다. 그러다가 청의 만주에 대한 봉금제도(封禁制度)가 해제된 뒤에야 비로소 발견되었다. 비석이 발견된 소식이 알려지자 여러 서예가나 금석학자들이 탁본을 만들었는데, 초기의 탁본은 대체로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보다 정교한 탁본을 만들기 위해 불을 피워 비석 표면의 이끼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비면의 일부가 탈락되었고, 또한 석회를 발라 비면을 손상시킴으로써 이후 연구에 논란을 일으켰다. 비문의 내용 가운데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시키고 논쟁을 끊임없이 불러일으킨 것은 둘째 부분의 신묘년 기사(辛卯年記事)이다.

일본에서 처음 입수한 비문은 만주지역에서 정보수집활동을 수행하던 포병 중위 사쿠오[酒句景信]가 1883년에 가져온 쌍구가묵본이었다. 이를 기초로 참모본부에서 비밀리에 해독작업을 진행했고, 그 결과 1888년에 요코이 다다나오[橫井忠直]가 아세아협회의 기관지인 『회여록(會餘錄)』 제5집에 <고구려고비고(高句麗古碑考)>를 게재함으로써 일반에게 알려졌다. 여기에서 신묘년 기사를 “왜가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와 신라 등을 깨고 신민으로 삼았다(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以爲臣民 : □는 훼손된 문자 )”고 해석했는데, 이후 이 신묘년 기사를 4세기 후반 신공황후(神功皇后)가 한반도 남부지역을 정벌했다는 『일본서기(日本書記)』의 기록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그 결과 이른바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이 정설로 정착되었다.

이에 자극을 받아 한국인들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우선 1908년 간행된 『증보문헌비고』에 비문이 수록되었고, 1909년에는 박은식과 신채호가 언론에 간단히 소개하기도 했다. 민족주의사학자 정인보는 1930년대 말에 저술한 「광개토경평안호태왕릉비문석략(廣開土境平安好太王陵碑文釋略)」에서 ‘도해파(渡海破)’의 주어를 고구려로 보아 “왜가 신묘년에 왔으므로, (고구려/광개토대왕)가 바다를 건너가 왜를 깨뜨리고 백제와 □□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하여 일본인들과는 다른 견해를 제시했다.

1972년에는 재일동포 사학자 이진희(李進熙)가 참모본부의 이른바 ‘석회도부작전설(石灰塗付作戰說)’을 주장하여 큰 파문이 일어났다. 그는 일본이 만주를 침략하기 위해 현대사는 물론 고대사까지 조작 왜곡하여 정당화하기 위한 조작극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과거 불분명했던 자획까지도 분명하게 되어 있는데 이것은 석회도부의 결과로서, 고마쓰[小松宮] 탁본을 참고하여 미다쿠[三宅米吉]가 쓴 「고려고비고추가(高麗古碑考追加)」가 이를 증명한다고 주장하고, 그 결과 ‘왜이신묘년래도해파’(倭以辛卯年來渡海破)도 확신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이진희, 『광개토왕비의 연구』, 일조각, 1982)

이를 계기로 기존의 임나일본부설을 재검토하기 시작했다. 1981년 이형구(李亨求)는 비문 자형(字型)의 짜임새[結構], 좌우행과의 비교에서 나오는 자체(字體)의 불균형 등을 근거로 '倭'는 '後'를, '來渡海破'는 '不貢因破'를 일본인이 위작(僞作)한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럴 경우 신묘년 기사는 “백제와 신라는 예로부터 고구려의 속국으로 조공을 바쳐 왔는데, 그 뒤 신묘년(331)부터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백제·왜구·신라를 공파해 신민으로 삼았다”는 내용이 된다. 이 주장대로라면 일본 사학계의 이른바 ‘남조선경영론’이 근거를 잃게 된다.

지리적 잇점이 큰 중국에서 초근에 이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1984년에는 중국의 왕젠췬[王建群]이 장기간의 실지조사를 토대로 『호태왕비연구(好太王碑硏究)』를 발표했는데, 그는 이제까지 잘못 읽은 부분은 시정하고 탈락된 문자를 복원했다고 주장하고, 비문의 총 글자를 1,775자로 확정했다. 그리고 비문에 등장하는 왜(倭)를 일본 기타큐슈[北九州]의 해적집단으로 보아 임나일본부설을 부정했을 뿐만 아니라 이진희의 석회조작설도 비판했다. 그러나 그의 연구에도 한계가 발견되고 있다. 도회부분은 탁공(拓工)들이 고가판매를 위한 무지의 소치라고 주장하였는데, 발견 초기의 탁본은 고가 판매를 위한 것이 아닌 것임에도 조작된 것이 나타나는 부분에 대한 해명이 부족하다.

광개토왕릉비의 내용은 그 주체가 고구려(광개토왕)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왜나 그 외의 것이 주체가 될 수는 없다. 이 비는 사료가 부족한 한국 고대사의 실상을 풀어줄 수 있는 사료적 가치가 매우 큰 것으로, 내용의 정확한 판독이 이루어짐으로써 한국 고대사를 분명하게 해줄 것이다. 나아가 한·중·일 3국간 특히 일본과의 관계를 해명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3국간의 협동연구가 보다 심층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아 확실한 결론은 아직 내리지 못하고 있다.
 
<이장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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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에서 저녁먹은 식당~









 

 

화장실에 쓰여 있는 글~


 


 

 

산문앞에서 먹은 점심입니다......제일 입에 안맞더군요~

방에서 먹었는데 층층이 침대?를 쌓아 놓은게 잠도 자는것 같습니다.

여기서 자고 종주들을 한게 아닌지 생각이 듭니다~





 

가는길에 보이는 천지쪽입니다~


 

천지 [天池] 
 

백두산 산정에 있는 자연호수.


백두산 천지 / 용암이 분출하여 용암평원을 이루었으므로 순상화산(楯狀火山)의 형태를 보여주며 중앙화구는 함몰되어 칼데라가 되었다. 천지의 맑은 물은 압록강과 두만강, 중국 송화강의 원류가 된다.
 
 
 
용왕담(龍王潭)이라고도 한다. 면적 9.17㎢, 둘레 14.4km, 최대너비 3.6km, 평균 깊이 213.3m, 최대 깊이 384m, 수면 고도는 2,257m이다.

칼데라호(caldera 湖)인 천지 둘레에는 장군봉(將軍峰)을 비롯한 화구벽 오봉(火口壁五峰)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다. 이 화구벽에서는 남쪽의 불목[火項]이라고 하는 파극(破隙)을 통해서만 호반으로 내려갈 수 있으며, 호반 일대에 약간의 평탄한 땅이 있을 뿐 그 밖에는 깎아세운 듯한 절벽뿐이다.

여름철에는 사슴·곰 등의 짐승이 물을 마시기 위해 이곳으로 모여든다. 호수의 수온은 10℃ 내외이고 빈영양호(貧營養湖)이므로 식물성 부유생물·작은 곤충류·물속 이끼류가 살고 있으나 어류나 파충류는 서식하지 않는다. 하지만 1984년 북한에서 수많은 산천어 치어를 백두산 천지에 넣어서 현재는 천지산천어가 서식한다.

호수 북쪽의 한 곳이 터져서 물이 흘러나가는, 달문(闥門)이라고 하는 화구뢰(火口瀨)를 이룬다. 호수는 여기서부터 흘러내려 650 m 북류하다가 용암벽에 막혀 길이 30m의 장백폭포를 이루면서 협곡을 만들며 쑹화강[松花江]으로 유입된다. 호반의 동안과 남쪽 산기슭의 쑹화강 상류인 탕수평(湯水坪)에서 온천이 솟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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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0계단~












 

 




 

 

계단표시......1000번째~











 















 

















 















 















 

 

제자하 주차장------화산석입니다~













 











 











 

 

백두산 금강대협곡을 돌아다녀보면 곳곳에 커다란 나무들이 쓰러져있습니다.

이렇게 큰산에 나무들도 작다.

백두산 많은 부분이 흙 아래엔 이렇게 용암이 흘러 굳어진 돌들이 깔려있답니다.

그래서 나무들도 자라지 못한답니다.

 

우리나라도 이렇게 생긴돌이 생산된다하는데 어디인지는......

정원에 깔고 틈새로는 잔디가 자라면 참 좋답니다.

참 삼겹살 구워먹는데 좋다하네요...ㅎㅎ 











 

 

 

백두산 관광후 석식~















 

 

고구려 역사탐방 기행문 ⒀ 중국에 뺏기고 만 세계문화유산 ‘졸
 
글쓴이 : 김남렬 날짜 : 05.06.17 조회 : 957
 
 
동북공정 일환 마구잡이 복원으로 역사 왜곡

고구려의 첫번째 수도 졸본성

고구려의 첫 번째 수도는 중국 환인(桓仁)이다. 이 환인의 인근에 오녀산성(五女山城)이라는 곳이 있는데 이곳에 고구려의 시조 주몽이 나라를 세우고 첫 도읍지로 정했다. 이곳이 졸본성(卒本城:忽本城)이다. (졸본성, 홀본성, 오녀산성) 어떤 자료에서는 그 명칭을 홀승골성(忽升骨城)이라 칭하는데 다 같은 뜻으로 본다.
앞서 우리가 찾아갔던 광개토대왕비에 보면 “시조 추모왕(鄒牟王-주몽)께서 처음으로 나라의 기틀을 세우고 비류수(沸流水)가 흐르는 비류곡(沸流谷) 졸본(忽本)서쪽 산위에 성을 쌓아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고구려라 했다”는 기록이 있다. 비류곡은 현재 혼강(渾江)일대 계곡이고 환인을 말한다. 또한 환인은 졸본(忽本-홀승골성)이라고 칭하고 여기에 있는 오녀산성에 첫 도읍지를 정했다는 것이다.
산아래에서 쳐다보이는 그 산성의 장대함은 이루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인공적 축성이 아니라 자연 그대로의 성이다.

오녀산성과 졸본성

오녀산성의 구전설화를 들어보면 이름 그대로 다섯 여자가 등장한다. 그 먼 옛날 하늘에서 흑룡이 내려와 주민들을 몹시 괴롭혔다. 그래서 이 지방의 “다섯 자매가 용감히 맞서 그를 물리쳤다”는 얘기다. 이 내용은 중국인들이 말하는 간단한 설화인데 어찌 보면 고구려역사를 자국의 역사로 편입시키기 위한 중국인들의 각본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그래서 어떤 자료에 보면 이곳을 홀승골성(忽升骨城) 이라고도 한다. 졸본성인 이곳을 오녀산성 이라는 이름으로 그 위엄을 격하시킬 의도는 없었는지….
고구려 초기에는 주위의 여러 국가(부족)에 둘러 쌓여있었고 그러함에 적들로부터 안전하게 국가와 국민을 수호 하여야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주몽이 이렇듯 천혜의 요새에 첫 도읍을 정한 것은 적들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할 뿐 아니라 설사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이 산성에 기어 올라왔다 하여도 그 과정에서 이미 기진맥진 한 적군은 더 이상 전투 할 의지를 상실할 수밖에 없는 곳이다. 천혜의 요새인 이곳 졸본성은 해발 800m에 남북길이 600m 동서너비 200m에 이르며 그 둘레가 1km나 된다. 이러한 우뚝 솟은 산 정상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넓고 평탄한 공간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 궁성터, 거대한 성곽, 대규모 주거단지 등이 발견되고 특히 산의 위쪽에는 여러 개의 식수원인 우물터가 있는 데는 참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산 위에 올라와보니 마치 그곳이 하늘에 와 있는 듯 흥분과 함께 심장이 요란하게 박동치고 있었다.
그러나 중국정부는 이곳을 ‘대형 주거지’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필경 이 경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신청을 하는 과정에서 왕궁(王宮) 이라는 표현을 쓰기가 껄끄러워 의도적으로 축소하고 딱히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라고 판단된다. 이 왕궁터 외에도 이곳에는 대형 주거지 2개소와 소형주거지, 집단 병영터 등이 발견되었다.
대형 주거지에서는 식량창고로 보이는 자리와 특히 배수시설로 보이는 돌로 된 곳이 발견되어 초기 고구려의 주거문화 연구에 큰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구전에 의하면 “7월에 7일 동안 하늘이 보내준 수천 명의 사람들이 구름과 안개가 뒤덮인 속에서 나무를 찍고 돌을 다듬어서 왕궁을 짓고 성도 쌓았다”고 전해 오고 있다.
또한 이곳 졸본산성 위에는 앞서 말한 대로 식수문제 해결을 위한 우물(저수지)이 아직 남아 있다. 왕궁터 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는 곳에 일명 천지(天池)즉 하늘의 우물이 있는 것이다. 길이 12m, 너비 5m, 깊이 1~2m 의 직사각형 모형의 저수지형 우물이다. 해발 800m 인 이곳 산성 정상에 이처럼 큰 우물에 물이 충족되려면 엄청난 양의 수량이 있어야 하는데 이곳을 보고 참으로 기이하게 느껴졌다. 구전에 의하면 이물은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수십 수백 명이 먹고도 남았으며 여름에는 성내의 모든 백성이 목욕도하고 농사짓는 데에도 썼다한다.
아직은 상존하고 있는 이 우물은 2000년을 넘게 유지돼 왔었다. 그런데 문제는 몇 년 전 중국이 이곳을 복구한다며 시멘트로 뚝 주변을 손질하는 등 훼손이 심해 지금은 물의 흐름이 제대로 되지 않아 물의 색깔이 검붉게 변해 있었다.
이러한 전설을 갖고 있는 이곳을 중국정부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해 주거시설 일부를 복원하였다. 즉 중국정부가 복원시킨 고구려인들의 주거시설은 삼각형의 짚으로 역은 지붕과 황토로 온돌 구들장을 만들고 작은 주방시설을 갖추어 음식을 할 수 있도록 구조를 만들었다. 그러나 이러한 주거시설은 고증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왕궁터를 일반주거시설로 격하시켜 조잡하기 이를 데 없으며 억지로 꿰어 맞추기 변형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곳을 지난 2001년 북한이 유엔(UN-UNESCO)에 고구려 고분군에 대한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시도하자 중국당국이 서둘러 지정을 받은 곳이다.




 

 

사과를 말리네요~










 

 













 

환룡호~











 


























 











 















 

 






 

 

단동 압록강변~



 

 

압록강 철교~






 

 

 


 

북한땅~



 

북한땅~  그리고 사람들











 















 

다시 대련~  길을 잘못들어 이런 사진도 찍습니다.


 

 

간판이 재미 있네요......단인간, 쌍인간등....ㅎㅎ



 

공중전화~



 

중국 대련에서의 마지막 식사......거의 한국에서 먹는거라 생각~


대련 비행장~


 

인천입니다......

시내를 통과하지 않고 월미도로 바지선타고 외곽으로 빠진답니다.














대련에 거의 다 왔을때 비행기 밖을 보니 곳곳이 공사판이다......

날로 발전하는 중국의 한 모습을 보는것 같다.

 

버스를 타고 노호탄 광장과 러시아 거리를 구경하기 위해 시내로 들러섰을때

한자간판들이 여기가 중국이구나 느껴진다.

노호탄은 그냥 그렇고 러시아거리는 차창밖으로 지나가면서 본다.

그냥 단동으로 가는게 낳을것 같다.

인천에서 배타고 단동으로 오면, 단동으로 가는 비행기가 있다면 ???

 

대련, 단동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차창밖을 보니 끝없는 옥수수밭이다.

두어시간 넘게 달려 휴게소에 도착하여보니 시골의 편의점같다.

휴게소도 딱 하나란다.

 

밤 늦게 단동에 도착

호텔에 도착해 방을보니 좋다. 침대 두개등 훌륭하다. 4성급이라더니.......

첫날이라 그런지 잠도 잘 들지 않고......

이생각 저생각에 타국의 한 여행객이 잠못 이루는 밤......

 

아침에 일어나 호텔 뷔페......

무언지 잘 몰라 토스트와 계란반숙에 우유, 오렌지쥬스로 때운다.

특이하게 토스트는 각자가 구워먹게 되어있다.

 

호산산성으로 가는길은 압록강변을 따라간다.

강 너머 북한이다.

북한의 산들은 다 민둥산이다. 위에까지 무었을 재배하는지 이랑같은게 보인다.

많은 비가 오면 수해가 안날수 없을것 같다.

 

-아는만큼 보인다-라는 말이 실감난 호산산성이다.

가이드 말만 듣고 관람후 집에와 검색해보니 좀더 구경 못한게 아쉽다.

 

일보과......한발떼면 북한,,,  적은 개을너머 철조망......그리고 옥수수 밭들~

일보과 가는길은 중국여인들의 천원 천원 하는 호객소리가 시크럽다.

여러가지 과일, 계구이, 중국술등

 

다시 버스는 고구려의 유적이 제일 많은 집안으로 달린다.

중식을 하고 환도산성으로......앞은 트였고 사방은 다 산으로 막혀있다.

천험의 요새인것 같다.

 

장군총으로......

엄청난 무덤이다. 길지에 이만한 무덤을 축조할려면 얼마나 강한 나라였을까?

 

광개토왕비로......건물 안에서는 관리인이 사진을 못찍게 한다.

 

버스 타는데로 나오니 사람들이 옥수수를 판다.

옥수수밭은 매일 질리게 보았는데 먹어보는건 처음이다.

우리 괴산 찰옥수수가 더 맛있다.

지나고 보니 국내성터는 못 보았다...가이드가 빼묵었으니......

조중철교--- 집안과 <--->북한 만포 사이의 철교

사진은 못찍게 하고 ......철교를 걸어서 반절까지 가 보고 북한 산하도 구경했다.

 

 

통화를 거쳐 백산으로

가이드 말로는 통화보다 백두산 서파가 한시간 더 가깝다고 합니다.

호텔에 짐은 놔두고 가벼운 베낭을 메고 몇시간 달려 산문에 도착

점심을 먹고(중국식이라 합니다-제일 입맛에 안 맞습니다).

산문에서 서파 주차장까지 버스로 이동(공원버스)

1280계단을 올라 천지를 보다.

 

우리의 영산, 마음의 고향 천지를 보는 감동은 말로 다 할수 없습니다.

5호 경계비에서 이쪽은 중국, 저쪽은 북한

 

북한을 통하여 가깝게 왔으면 별로 시간도 안걸리고......

경제적인 이득도 북한에서 많이 볼건데라는 생각에 안타갑고요.

고구려 유적지와 백두산을 돌아녀보니 한국사람들 엄청 많이 오더군요.

그돈이 다 중국으로 돌아가니 아깝지요......

 

다시 버스를 타고 제자하와 금강대협곡을 구경하고 백산으로......

아침후 환인으로

고구려 첫 도읍지라는 졸본성으로 갑니다.

그 높은 절벽위에 넚은 터가 있고 물이 나온니 천험의 성터였던것 같습니다.

비류수는 막아 환룡호를 만들고 그아래 많은 유적들은 물속에 잠겼다 합니다.

 

유네스코 지정인지 화장실은 제일이었던것 같습니다.

 

점심을 먹고 단동으로......

압록강변에서 유람선을 타고 철교와 북한땅을 바라보며 한바뀌 돌아오는데

왜 북한사람들이 안돼보였던지 아직도 그 모습들이 아른거립니다.

 

압록강 중심에서 바라본 중국 단동과 북한 신의주

왜 이렇게 대비가 되는지~~~

저녁때이어서인지

단동은 우후죽순처럼 솓은 건물과 휘황찬란한 불빛......

저쪽 북한땅은 시커먼 어둠!

 

다시 아침을 먹고 대련으로......

한시간쯤 흐른후 화장실.....

그 이후 화장실이 대련 점심먹는 식당까지 5시간 넘게 걸린것 같습니다.

중국사람들이 방광이 더 큰것 같습니다.

 

중국여행-고구려 유적지와 백두산 천지 관광- 잘 다녀왔습니다.

 

참으로 넚은 땅

옛날엔 우리 선조들이 경영한 땅

보고 또 보았다.

 

지금은 한반도로 국한된 땅에

그것도 남과 북이 갈려

서로 반목해가며 살고있는 우리

 

앞으로

서로믿고

통일하여

 

옛날에 대륙을 누비던

그 기상을 오늘에 살려

초강대국 대한민국 만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