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130[우포늪에서~~~]
언 제 : 2011년 1월 30일 일요일......바람불어 몹시 추운날
어디로 : 우포늪
누구랑 : 인생길따라 도보여행 대충방 행님들과
창령군 우포늪사이버생태공원 홈피에서 펌
원시적 저층늪이 그대로 간직된 우포늪 70여만평에 이르는 천연 늪속에는 희귀동식물이 서식하며 동식물의 천국을 이루고 있습니다. 우포늪은 국내 최대 규모로, 천연의 자연경관을 간직하고 있어 자연환경보전지역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 우포늪 : 경상남도 창녕군 유어면 대대리, 세진리 일원 (1,278,285㎡)
- 목포늪 : 경상남도 창녕군 이방면 안리 일원 (530,284㎡)
- 사지포 : 경상남도 창녕군 대합면 주매리 일원 (364,731㎡).
- 쪽지벌 : 경상남도 창녕군 이방면 옥천리 일원 (139,626㎡)
- 좌표 : 35°33′N, 128°25′E
소개
우포늪은 국내 최대의 자연늪이다. 창녕군 대합면 주매리와 이방면 안리, 유어면 대대리, 세진리에 걸쳐있는 70만평.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광활한 늪지에는 수많은 물풀들이 머리를 내밀고 있다. 부들, 창포, 갈대, 줄, 올방개, 붕어마름, 벗풀, 가시연꽃 등이 무더기로 자라고 있다. 늪에 반쯤 밑동을 담그고 있는 나무들이 '원시'의 분위기를 자아낸다. 개발이란 미명아래 국내 많은 늪은 사라지고 이제 늪의 모습을 제대로 갖추고 있는 곳은 국내 한 곳. 바로 우포늪뿐이다.
뭍도 아닌 물도 아닌 늪,
국내 최대규모로서 온갖 풀, 나무, 곤충, 물고기, 새 그리고 인간을 품에 안은 자애로운 곳. 원시적 저층늪을 그대로 간직한 마지막 자연늪인 우포는 산으로 둘러싸여 개발이란 탐욕의 칼날을 피할 수 있었던 '
생태계 박물관'
바로 그것이다.(경향신문 1996/5/30)
이젠 보존해야할 우포... 우포늪은 1997년 7월 26일 생태계보전지역1)중 생태계특별보호구역(환경부고시 1997-66호)으로 지정되었으며 국제적으로도 1998년 3월 2일 람사르협약2) 보존습지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1999년 8월 9일 습지보호지역3) 으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이제 우포는 세계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보존해야 할 곳이 된 것이다.
- 1) 생태계보전지역(자연생태계보전지역) : 환경부장관이 자연환경 보전지구에서 자연생태계의 보전이 특별 히 필요한 지역에 대하여 설치한 자연생태계 보호구역(자연환경보전법 제15조).
- 2) 람사르협약 : 물새 서식지로서 특히 국제적으로 중요한 습지에 관한 협약.
- 3) 습지보호지역 : 자연상태가 원시성을 유지하거나 생물다양성이 풍부한 지역 등 특별히 보전할 가치가 있는 습지를 보호지역으로 지정한 곳이다. 이 지역은 1999년 2월에 제정된 습지보전법에 의해 보호된다.
우포늪만의특징
우포습지와 낙동강으로부터의 영향
우포와 같이 큰 강에 가까이 있는 습지 (홍수지대 습지: floodplain wetland)는 강의 영향을 크게 받는 습지이다. 강의 주변에는 강의 흐름이 굽이굽이 흐르다 잘려서 생긴 우각호(oxbow lake)나 낮은 지대에 물이 고여 생성되는 습지 등 매우 다양한 형태의 습지가 있다. 우포는 화왕산에서 발원한 토평천이 늪으로 유입된 후, 토평천을 통해 낙동강 본류와 적포 즈음에서 연결되어 있다.

낙동강으로부터의 영향

비가 연속적으로 내리는 집중호우나 홍수기가 되면 낙동강의 수위가 평상시보다 7-8m이상 상승하고 상승한 낙동강 본류의 수위는 토평천을 거슬러 올라가 우포습지의 집수역에서 내려오는 물과 함께 습지의 수위가 4-5m이상 크게 상승한다. 홍수로 증가한 수위는 3-4일에서 길게는 10여일 정도까지 머물며 홍수에 견디지 못하는 육상식물들을 죽게 만든다. 그러나, 원래 홍수에 잘 견디는 식물은 다시 자라게 되고 물위를 떠다니던 개구리밥이나 생이가래와 같은 부유성 식물은 제방의 언저리에까지 올라가 물이 빠지면서 말라죽게 된다. 또 일부는 본류로 떠 내려가 하류로 이동하기도 한다.
홍수로 인한 직접적인 영향

수위가 상승하고 탁한 물이 지속되면 우포에 서식하고 있던 식물은 크게 영향을 받는다. 일차적으로 물 표면의 부유식물은 늘어난 물을 따라 흩어지게 된다. 홍수로 늘어난 부유물질은 빛의 투과량을 감소시켜 물 속에 잠긴 수생식물들의 광합성에 큰 지장을 초래한다. 불어난 물이 안정되는 동안에 물 속의 미세한 부유물질들은 가라앉으면서 잎의 표면을 덮어 이차적으로 광합성을 저해하게 된다. 그러나, 넓은 면적을 침수시키기 때문에 부유하던 식물이 흩어져 홍수가 완전히 물러가고 수위가 낮아지면 표면으로부터 많은 빛이 투과되어 물 속의 식물과 식물플랑크톤이 만들어내는 산소의 양이 증가하기도 한다. 홍수가 지나간 후 보기에는 식물상이 완전히 교란된 것처럼 보이지만 많은 생물들이 새로 차지할 공간이 생겨 매우 역동적인 환경이 만들어진다. 따라서 홍수는 늪 생태계를 지탱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다.
![]() |
![]() |
우포늪은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1만5천년 전 빙하기가 최대였을 때 해수면(바다의 수면)은 지금보다 100m 이상 낮았다. 이때 남해바다는 낙동강 하구에서 60㎞나 떨어져 있었고 낙동강과 우포늪은 폭이 좁고 깊은 골짜기였다. 골짜기의 깊이는 퇴적암층이 누워있는 지하 10m였거나, 또는 그보다 훨씬 깊었을지 모른다.
빙하가 녹기 시작하면서 1만년 전에는 바닷물이 현재의 해수면보다 25m 아래, 8천년 전에는 10m 아래까지 차 올랐다. 바닷물은 6천년 전에서야 현재의 높이에서 안정된다. 빙하가 녹으면서 육지의 골짜기였던 낙동강 계곡으로도 바닷물이 들어와 낙동강 하구에서 160㎞ 떨어진 경북 고령군 88고속도로 고령교(88고속도로)까지 바닷물이 넘실댔다. 낙동강은 이때 강이 아니라 내륙의 좁은 만(灣)이었다.
바닷물이 들어오기 전까지 홍수가 나면 골짜기 상류에서 낙동강을 따라 흘러내린 돌과 흙이 지리산 계곡에서처럼 계류에 실려 멀리 옮겨졌다. 그러나 바닷물이 들어온 뒤에는 좁은 만의 바닥에 쌓였다. 이같은 과정을 반복하면서 점차 바닥이 해수면보다 높아지고 그 사이를 따라 강이 흐르게 됐다. 이후 강의 양쪽에 모래와 흙이 쌓여 비옥하고 넓은 둑(자연제방)을 만들었다.

현재 우포는 낙동강 본류에서 동쪽으로 7㎞ 가량 떨어져 있다. 화왕산에서 시작해 창녕읍을 지나온 토평천이 이 늪으로 흘러 들어왔다가 낙동강으로 빠져나간다. 그러나, 토평천이 우포늪으로 실어온 흙과 모래의 양이 그렇게 많지 않아 해발 고도가 9.6m인 반면, 하류인 낙동강 쪽 자연제방은 홍수때 실려온 퇴적물이 작은 동산처럼 높게 쌓여있다(해발 14~17.5m). 홍수가 나면 낙동강물이 우포로 역류하고 평상시에도 배수가 원활히 이뤄지지 않아 이 일대는 물이 고여있는 늪이 됐다.
문헌기록과 우포늪의 변화
옛 문헌에는 '우포' 라는 지명은 나오지 않는다. 가장 오래된 지리지(우리 나라의 땅 그림)인 세종때의 경상도지리지,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소하천이나 소택지에 관한 기록은 찾아볼수 없다. 성종조(1477년)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 창녕현편에 물슬천(勿瑟川), 이지포(梨旨浦), 누구택(樓仇澤), 용장택(龍壯澤)의 기록이 나오고 순조조(1832년)에 편찬된 경상도읍지에도 같이 기록되어 있으며, 철종조에 편찬된 대동여지도(김정호, 1861년)에는 물슬천과 이지포는 지도에 나타나 있으나 누구택 대신에 누포(漏浦)라는 지명이 나와 있다. 이들 지리지에 나오는 지명은 동국여지도, 경상도읍지의 창녕현지도 및 현지형도를 근거로 분석해 보면 물슬천은 지금의 토평천이며 용장택은 현재는 개간되고 없는 대합면에 있던 용호를 지칭하는 것으로 짐작된다.
이지(梨旨)라는 지명은 토평천 하류부 성산리에 이지(梨旨) 혹은 배말리라는 지명이 나타나 있으나 현재 이 위치에는 소택지가 없다. 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 누구택과 대동여지도의 누포는 그 위치가 현 우포와 거의 일치하고 있다.
조선시대가 끝나고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면서 일제에 의해 지명들이 개정되고 우포, 목포, 사지포로 명기되어진다.(*현지주민들은 지금도 소벌, 나무벌, 모래벌로 지칭한다) 1918년에 만들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50000:1 실사지도가 만들어지고 지금과 같은 지명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다행히도 우포늪 주변의 원형을 볼 수 있다. 또 같은 해에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조선지지(地誌) 자료에는 '창녕에는 천지를 제외하면 한반도에서 가장 큰 우포가 있다.' 는 기록이 있다.(한국문화연구 · 부산대) 그리고 일제가 문화정책의 일환으로 1933년 '보호사적에 관한 법률' 을 만들고 우포를 천연기념물15호로 지정하여 보호하였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우포늪은 큰 변화를 맞게된다. 지금의 우포늪 동쪽에 있는 대대제방을 축조하여 대대들을 개간하여 우포늪은 3분1가량 줄어들게 되고 제방을 만들어 홍수피해가 전보다 줄어들자 마을 뒷산 기슭에 동네를 이루고 살던 대대리 주민들도 그 아래 평평한 곳으로 대부분 내려와 살게된다.
광복이후, 1962년 12월 백조(고니)도래지로서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오다가 1973년에 백조(고니)가 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천연기념물 지정이 해제되면서 우포늪은 또 한번의 큰 변화를 겪는다. 도시의 산업화와 농경지 확장사업이 본격화되면서 낙동강과 토평천에 제방이 만들어지고 주변의 우포늪과 같은 사몰포, 용호 등과 크고 작은 대부분의 늪지들이 농경지로 변하였다.

이때부터 지역주민들과 환경운동 단체와 정부의 갈등이 있게된다. 이용과 보전이라는 측면에서 지역주민들은 어로와 대칭이, 고동 등을 채취하여 생활해 온 삶의 터전을 잃을 것을 우려했고 환경단체는 보호구역 등을 지정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였다. 여러 번의 공청회와 대화를 통하였고, 환경부는1997년 7월 26일 생태계보전지역으로 지정하였고, 이듬해인 1998년 3월 2일에는 국제협약인 람사협약에 등록하고, 1999년 2월 8일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정부는 습지보호지역 내에서 농사를 짓던 사유지 20 만평을 1998년부터 2002년까지 매입하고 환경감시원을 두어 차량의 진출입을 통제하고 불법어로와 환경감시를 하고있다. 현재 우포늪이 속해있는 창녕군은 물론, 지역주민과 민간환경단체들도 우포늪의 보전과 관리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 소벌, 나무벌, 모래벌, 쪽지벌은 현지 주민들 사이에 불려지는 이름으로 우포, 목포, 사지포는 이를 한자로 바꾼 것을 알 수 있으나 문헌에 나오는 이지포, 누포 등과는 연관성을 알아내지 못했다. 좀 더 많은 연구가 있어야 될 것으로 보여진다.
인용자료
土坪川 沿岸 沖積平野의 地形發達 (申潤鎬, 1983년, 경북대 석사학위논문) 우포늪 넓게 보기 (송동운기자, 국제신문기사, 2001.5.14일부터 4회) 창녕군지 (창녕군, 1984년)
* 자료제공 : 부산대학교 주기재 교수